『본 헌터』 고경태 “죽은 자의 뼈에는 색깔도, 거짓도 없었다…유골의 증언, 그날” [김용출의 한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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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로 오른 굴삭기가 내 북쪽 2미터 부근에서 움직였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땅을 건드리며 45도 각도의 비탈 아래로 내려오는데 무언가가 걸렸다. 반대편에서는 호미질이 한창이었다. 며칠간의 작업 끝에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어떤 라인이 포착되었다. 2023년 3월10일 오전 9시30분,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나는 ‘노출’되었다.”(17쪽)

 

지난해 봄, 아산 성재산에서 정체불명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양손이 ‘삐삐선’이라 불리는 군용전화선으로 묶인 채 일렬로 엎어져 있었다. 그 앞으로 역시 양손이 결박된 한 유골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치 잠에 든 듯한 모양새였다. 그에게는 식별번호 ‘A4-5’가 붙여졌다.

충남 아산 성재산에서 발견된 유골 ‘A4-5’. 한겨레출판 제공

“나는 측정되고 감식되고 분석되었다. 머리뼈는 어떠한가. 최대 길이는 170밀리미터, 최대 너비는 142밀리미터, 광대 사이 너비는 145밀리미터⋯. 기초조사가 하나씩 진행되었다.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어른인가, 아이인가. 내 키는 몇 센티미터인가. 또 얼마나 성한 상태인가. 그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묻기까지 몇 년이 걸린 것인가. 73년. 나는 A4-5다.”(20쪽)

 

A4-5는 과연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분석 결과, A4-5는 한국전쟁기에 숨진 건강한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의 남성으로, 허벅지 뼈를 기준으로 키는 165센티미터로 추정됐다. 근처에는 삐삐선과 탄피 사이로 ‘중’자가 새겨진 단추들이 여럿 나왔다. 중학생도 있었다는 뜻이다. 왜 A4-5 일행은 산속에 줄줄이 끌려와 죽었을까.

 

이야기는 유골, 생존 피해자, 유가족, 주변인 등의 시점을 따라서 사건의 진실을 향해서 천천히 나아간다. 1995년 인근에서 정체불명의 유골을 발견했던 건축 담당자 ‘인욱’, 성재산으로부터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 새지기의 유골 ‘새지기2-1’과 ‘새지기2-2’, 한국 전쟁기 판사였던 ‘병진’, 국회프락치사건의 피해자 ‘용길’, 아산의 설화산에서 머리카락이 꽂힌 채 발굴된 은비녀들, 유가족 ‘장호’⋯. 그리하여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민간인 학살 사건과 유가족과 생존 피해자, 가해자의 시선들⋯.

 

“또 하나의 꿈은 사람이었다. 사람은 필생의 연구과제이기도 했다. 사람이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뼈였다. 선주는 혼잣말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을 할 거야.’ 선생님에게도 말했다. ‘저는 사람을 하겠습니다.’ 1979년 5월21일, 선주는 처갓집에 짐을 부렸다. 갖은 열망을 안고 10년의 미국 생활 출발선에 섰다.”(26쪽)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지역 369고지에서 발견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최승갑씨 유골.

팽팽한 긴장감과 강렬한 호기심을 야기한 이야기는 곧바로 꿈과 사랑, 삶의 대한 소망으로 가득한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로 바뀐다. 인생의 변곡점이었던 미국 버클리대 유학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람 뼈의 증언을 좇는 집념의 ‘뼈 인류학자’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공부보다 합기도에 더욱 빠져들었던 소년, 자신의 학문적 길을 이끌어 준 손 선생, 젊은 시절 폐결핵과의 사투, 버클리대 유학과 뼈들에 압도됐던 체질인류학 공부, 뼈를 바탕으로 진실을 도출하는 본 헌터로의 성장⋯.

 

연대 사학과와 대학원에서 한국사와 선사고고학을 전공한 박 교수는 미국 버클리대 인류학과에서 체질인류학과 고인류학을 전공했다. 체질인류학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인류를 포함한 영장류의 생물학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

 

그는 일본 훗카이도에 묻힌 강제징용자 유해 발굴을 시작으로 수많은 유해 발굴 현장으로 달려갔다. 2000년부터 6·25전사자 유해발굴 단장을 맡아 전국을 누볐고, 다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으로. 뼈에는 색깔도, 거짓도 없었다.

 

“석장리에서 공수리까지 석장리는 공주에 있고, 공수리는 아산에 있다. 또다른 말로 하면 이러할 것이다. 구석기 시대에서 한국전쟁까지. 예외적으로 21세기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도 있다. 나는 선사 시대와 근현대사의 사람과 유적이 묻힌 현장을 추적해 발굴하고 증언해왔다. 매개체는 뼈였다. 나는 체질인류학자다. 나는 본 헌터다.”(342쪽)

 

일간지에서 30여년 일해온 베테랑 기자이자 베트남전쟁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추적했던 저자의 신간 『본 헌터』(한겨레출판)는 한국 전쟁 당시 숨진 군인과 민간인, 피해자 등의 유골 추적기와 뼈의 증언을 좇는 집념의 인류학자 박 교수의 이야기를 재밌게 버무린 책이다.

 

책은 두 이야기를 교차해 풀어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유골, 생존 피해자, 유가족, 주변인 등 여러 화자의 시점을 통해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을 따라가고, 다른 하나는 인골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 평생 유해가 말하는 진실을 좇아온 뼈 인류학자 박 교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 가운데 배우 장동건과 원빈이 출연해 1000만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최승갑씨의 유해 발굴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영화 속에서 유해의 첫 발굴 순간과 가족에게 연락이 닿는 부문, 유품이 삼각자 대신 만년필이 발견되는 부문, 지석이 일병이 아닌 하사로 나온 것 등은 실제와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나는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앉아 있었냐면,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날짜로 말해야 한다면 2만 6440일 이상, 시간으로 환산하면 63만 4560시간 이상 앉아 있었다. 좀 더 쪼개 말하자면, 22억 8441만 6000초 이상 앉아 있었던 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숨 막혔는지 의식할 수도 없었다. 쪼그려 앉은 채로 숨이 끊어졌고, 머리 위로 흙이 덮였지만, 자세를 고치지 못했다. 한번 고치지 못한 이상 내 힘으로는 영원히 고칠 수 없었다. 쪼그려 앉아 흙과 하나가 되었다. 땅과 하나가 되었다. 산과 하나가 되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15쪽)

뼈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진실을 추적해온 인류학자 박선주 교수(왼쪽).

거대한 한국 현대사의 격류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한 이들과, 죽은 자들의 뼈 속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 나선 집념의 뼈 인류학자. 나라는 일인칭 화자를 내세워 독자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점점 충남 아산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육박해 간다.

 

특히 아산에서는 1950년 9·28수복 이후 국면과 1951년 1.4후퇴 국면에서 두드러지게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최종적으로 77명의 신원을 확인했고, 이 사건으로 최소 800여명의 아산 민간인들이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는 A4-5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 책에는 다음과 같은 박 교수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선주는 먼저 A4-5가 같은 집단 내에서 다른 포지션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묻혀 있던 위치와 자세, 군화 조각, 탄피수에 근거한 추정이었다. 선주는 A4-5가 학생 그룹에 속하지 않을 수 있지만 리더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 여겼다. 그는 좌익 세력의 주동자였을까. 모른다. 선주는 주민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다가 주동자로 찍힌 A4-5를 상상했다.”(338쪽)

 

책은 결국 뼈를 통해서 죽음의 이유와 특징을 탐문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다크 투어이고, 그 결과가 한국 현대사의 숨겨진 진실을 더듬으며 밝혀낸다는 점에서 역사 논픽션이다. 생생한 현장 사진과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한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속도감과 몰입감을 선사할지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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