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학 이끈 ‘이태준 월북전 작품 전집’ 선보여|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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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교본 펴낸 당대 문장가

李 조카 김명열 교수 편찬 이끌어

총 14권 중 1∼4권 1차분 출간

어느 날 서울 성북동으로 이사온 ‘나’는 황수건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황수건은 신문 배달원과 참외 장사를 했지만 실패하기 일쑤다. ‘나’는 황수건이 못나고 우둔하다고 생각한다. 실패자인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곤 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매일 황수건을 기다린다. 그는 엉뚱하지만 착하고 인정이 많다. 도시인들의 영악함에 지친 ‘나’에게 황수건의 천진한 심성은 위로가 된다. ‘나’는 장사가 망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황수건이 술에 취한 모습을 보며 이렇게 읊조린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일제강점기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방황하는 당대인들의 모습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담아낸 소설가 이태준(1904∼?)이 1933년 발표한 단편소설 ‘달밤’의 내용이다. ‘달밤’ 등 이태준의 작품을 수록한 ‘상허 이태준 전집’(열화당·사진) 1∼4권이 최근 출간됐다. 1권에 단편소설, 2권에 중편소설·희곡·시·아동문학, 3·4권에 장편소설을 각각 담았다. 2028년까지 총 14권으로 완간될 계획이다.

소설가 이태준이 1940년대 초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사진. 수연산방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화당 제공소설가 이태준이 1940년대 초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사진. 수연산방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화당 제공

근대문학을 이끈 이태준은 1925년 단편소설 ‘오몽녀’로 등단했다. 1934년 첫 단편소설집 ‘달밤’을 비롯해 소설, 희곡, 시, 아동문학 등에서 다양한 글을 남겼다. 소설가 이효석(1907∼1942)과 김유정(1908∼1937)이 활동한 문학동인 ‘구인회’의 창립 멤버다. 이태준은 특히 1940년 펴낸 글쓰기 교본 ‘문장강화’로 유명하다. 당시 문단에서 “시는 정지용(1902∼1950), 산문은 이태준”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이태준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광복 직후 월북해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 숙청당했다. 앞서 2015년 ‘이태준 전집’(전 7권·소명출판) 등 전집이 여러 번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월북 이전 그의 모든 작품을 망라하는 전집은 처음이다. 이번 전집에는 각 권마다 500∼1400개의 주석을 달았다.

주석 작업은 이태준의 조카인 김명열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84)가 주도했다. 김 교수는 “문학은 이태준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그가 북한에서 겪었을 가장 가슴 아픈 일 중 하나는 자신의 작품이 철저히 제거된 점일 것”이라며 “전집 출간이 외삼촌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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