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노동인데” 사라진 일자리, 연휴가 서러운 장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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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는 김홍기(62)씨. 주보배 수습기자
58살. 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는 김홍기(62)씨가 생애 첫 ‘노동’을 하게 됐던 나이다. 김씨는 2020년 7월, 첫 출근했던 그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김씨는 “나도 일하러 나가서 정말 기뻤다”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벌어서 제가 쓸 수 있는 그 자체가 보람이에요”
 


김씨는 서울시가 2020년 7월 시작한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얻었다. 김씨는 중·고등학교를 찾아 청소년을 대상으로 장애 인권을 교육했다. 서울 내 버스정류장을 다니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지 모니터링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을 일하면 김씨에게 주어지는 월급은 80만 원 남짓. 턱없이 적은 돈이지만, 김씨에게 ‘노동’은 그 이상의 값어치를 가졌다. 장애인권 교육을 하러 간 현장에서 학생들이 김씨에게 “장애가 있는데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이 멋지다”고 말해주면 더없이 뿌듯했다. 일을 하며 만난 소중한 동료들도 그의 큰 자산이 됐다.
 
“우-이, 나-아, 주-미…” 김씨가 얘기하자, 한참을 옆에서 듣고 있던 활동지원사 허종양씨는 “‘우리나라 국민’이라고 하시네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않냐, 나도 국민이다, 이런 뜻이에요”라고 김씨의 말을 대변해줬다.
 
“마음 아파, 너무 마음이 아파. 너무해. 정말 너무해” 서울시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을 폐지하면서 올해 1월 1일, 김씨는 일자리를 잃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김씨는 이번 설 연휴를 홀로 집에서 보내게 됐다. 동료들과 동해 바다에 가고 싶었지만, 수입이 사라져 몇십만 원씩 드는 여행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며, 김씨는 많은 것을 잃었다.
 

사라진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장애인들 “이것도 노동인데”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은 서울시가 2020년 7월 시작한 사업으로,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기 쉬운 최중증장애인도 참여할 수 있는 직무를 제공했다. 흔한 일자리들처럼 단순히 더 많은 이윤을 거두기 위해 얼마나 생산적인 일을 하느냐만을 따지는 대신, 일자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 권리’를 중심으로 장애인 일자리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 사업의 특징은 중증장애인들이 직접 △장애인 권익옹호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장려하는 데 있다.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 모니터링, 장애인 인식 개선 강의 및 캠페인과 같은 활동도 ‘노동’으로 인정해 중증장애인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고 소득을 보장하도록 지원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올해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중증장애인 400명이 올해부터 단번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
 
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는 이영애(58)씨. 주보배 수습기자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는 이영애(58)씨. 주보배 수습기자
취업 전, 퇴근하며 지옥철을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중증장애인 이영애(58)씨는 “일자리를 잃게 돼 너무 슬펐고, 좌절했다”면서 “밤에 잠도 안 오고 밥도 잘 못 먹겠다”고 토로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통해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 모니터링·캠페인을 수행했던 이씨는 “우리도 열심히 살고 있고,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알리는 게 좋았다”고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보람을 느낄 수 없다.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속옷을 사드렸던 뿌듯함도, 돈을 아껴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가는 행복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됐다.
 
이씨는 “중증 장애인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말고는) 일자리가 없다”면서 “우리 중증장애인 같은 사람들은 손도 못 움직이고 뭘 만들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일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 말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 야학에서 교재를 만드는 업무를 해왔던 중증장애인 김탄진(56)씨 또한 “(일자리가 없어져) 많이 분노했다”면서 “이제 급여를 못 받으니 내가 좋아하는 걸 못 먹게 됐다, 남들이 먹는 명절음식도 이번에는 못 먹게 됐다”고 털어놨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참여하던 중증장애인들은 지난해 말에서야 해고 소식을 통보받았다. 특히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전권협)은 서울시가 중증장애인들의 고용을 승계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전권협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참여하던 장애인 298명 중 106명(35.6%) 가량이 지난 9일 기준 ‘완전 실업’ 상태다.
 
전권협 우정규 정책국장은 “서울시에서 고용 승계를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을 한다면 거짓말”이라며 “기존의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에 참여했던 중증장애인들은 워낙 ‘중증’이기 때문에 일자리 선발 과정에서 다 떨어졌고, (서울시가 직접 나서) 취업 연계를 한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중증장애인 배제되지 않는 공공일자리 필요”

서울시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폐지했지만, 중증장애인들의 일자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해명한다. 서울시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대신 내놓은 장애인 일자리 사업은 ‘장애 유형 맞춤형 특화 일자리(맞춤형 일자리)’ 사업이다.
 
서울시는 “맞춤형 특화 일자리 사업은 시대 변화와 장애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직무와 근무처 발굴에 중점을 둔 사업으로, 장애 인식 개선 및 인권 강사, 문화예술 활동, 편의시설 및 콘텐츠 모니터링 등의 직무에는 중증장애인들의 참여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예컨대 시각이 발달한 청각장애인은 인공지능(AI) 데이터 라벨러 사업에 참여할 수 있고 뇌병변 등 중증장애인도 불법·저작권 침해 콘텐츠 검색 및 관련 기관 신고, 장애인 인식개선 관련 등 온라인 콘텐츠 모니터링 등을 수행하는 등 장애의 특성에 맞춰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맞춤형 일자리는 중증장애인들에게 적절한 일자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 정책국장은 “맞춤형 일자리 사업 내용 안에 ‘중증 장애인 우선 채용 기준’이라든가 중증장애인의 진입을 장려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하나도 없다”고 짚었다.
 


이어 “또한 해당 일자리는 ‘외주에 외주를 맡기는’ 격인데, 예를 들어 서울시가 A라는 장애인단체에 해당 사업 위탁을 맡기면, 장애인 노동자가 B라는 일반 회사에 출근을 하게 되는 형식”이라면서 “카페 등 일반 회사인 B에서 중증장애인을 선호할 리 없지 않냐,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기준에 중증장애인은 또 탈락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증장애인 김홍기(62)씨 또한 “(맞춤형 일자리)는 내가 할 수 없는 일만 하라고 하는 자리”라고 전했다. 김탄진(56)씨 또한 “(맞춤형 일자리는) 내가 할 수 없는 일들 뿐”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맞춤형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다며, 중증장애인이 배제되지 않도록 서울시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구대학교 조한진 사회복지학과 교수 또한 “맞춤형 일자리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 장애인의 모든 직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지, 이런 장애 유형이 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직종에만 종사해야 된다 참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면서 “장애인이 원하면 원하는 일자리를 주고, 그 직업 활동의 영역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것이 직업 선택의 자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인천대학교 전지혜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맞춤형 일자리의 경우) 최중증 장애분들에게 맞는 일자리는 제공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최중증 장애인들이 배제되는 것에 안타깝다”면서 “서울시가 다시 한 번 재고해서 최중증 장애인들에게도 맞는 형태의 일자리를 반드시 포함시키고 개발해야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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